순교자

생매장 순교지(여숫골)

산채로 묻어 죽여(한국천주교회사 하권 480쪽 2번째줄)
다른 곳에선 굉장히 깊고 넓은 구덩이를 파서 살아 있는 천주교인의 무리들을 포개 넣고 그 위에 흙과 돌 따위를 쌓아서 죽이고 묻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운다. ( 방마리아 박요한, 문마리아등이 1868년 무진년 5월 충청도 해미에서 생매장 당해 순교. 치명일기 716.718.719참조)

옛적에는 해미천이 해미 생매장 순교성지(여숫골)를 중심으로 좌우로 흐르고 있었고 이 곳은 마치 섬 형태를 지닌 곳으로 아름드리나무 오리나무 버드나무 등이 우거져서 "숲" 혹은 "숲정이"라 불리었다.
어떤 날 저녁때쯤 하여 사령들이 사람 수십 명을 길게 엮어서 끌고 조그마한 길로 바다를 향하여 가니 저게 웬일일까? 영장은 없고 형리들만 끌고 간다. 동리 사람들은 형역들이 무서워서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는 중 어떤 리씨 하나와 박승익 이라는 17세 된 아이와 리주필이 따라가서 보니 들을 지나 바다쪽으로 가다가 내를 건너니 이 내는 산에서 나옴으로 비올 때는 물이 많고 세어서 무서운 내이다. 이 내를 건너면 벌판에 오리나무와 버드나무 숲이 있는데 거기에 구덩이를 몇 개 파고서 끌고 온 사람들을 묻어 죽이려는 것이다. 끌고 온 이가 성교하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업체서 세우고 지금이라도 성교를 안는다고 하고 예수와 마리아를 욕들 하여라 지금이라도 놓아 주마 하였다. 그래도 오히려 공경스럽게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죽은면 천당으로 간다고 함으로 목도 매여 죽이고 그대로 산채로 파뭇기도 하였는데 이웃동네에 사는 조산(여아)이와 그 아이의 동무 몇이 그 광경을 보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 금치 못하였다 하며 돗투성이 김씨(여아)도 보았는데 묶어서 산채로 묻어 죽이는 그 틈에는 처녀들도 만이 섞여 다 하며 죽을 때 어떤 이는 아프다고 하고 예수 마리아를 부르고 어떤 이는 잠잠히 있었는데 사령들이 너도 예수 마리아를 불러라 하였다고 그 당시에 돌아다니는 풍설은 약을 먹어서 그와 같이 환장하였다 다른 사람 때문에 저렇게 죽었다 성교 하는 사람들은 착한데 왜 죽이는지 등의 일반의 가슴을 서늘케 하는 송구한 전설이 많이 유행 하였다고 한다.
(1935년 경향잡지 발행 해미순교약사 9쪽하단~11쪽 상단 에서 발췌)

박해의 모진 회오리 바람이 멈추고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된 후에 신앙의 자유는 이 땅에 찾아왔다. 이 곳 여숫골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버려진 땅으로 방치되었다 1905년에는 조선에 크나큰 홍수가 있었는데 이를 병오 대홍수라 한다. 이때 해미도 예외는 아니어서 숲정이도 홍수로 인해 쓸려 갔다. 1935년 3월말에 서산본당의 고 베드로 범 신부님은 해미 무명순교자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증인들을 찾게 되고 이때 당시의 목격증인 한범동, 리주필, 박승익씨 등의 목격담을 증거로 하여 해미천 건너 숲정이에서 유해발굴을 하게 되는데 여러 날에 걸쳐서 유해를 발굴하여 동년 4월 1일 대곡리 공소에서 유해를 모시고 밤샘 조배 기도를 하고 다음날 4월 2일 가재성당(상홍리공소:그당시는 서산본당이 현 상홍리 공소 자리에 있었음)뒷산 백낙선씨 가족묘지에 이장하였다. 〔그러나 일반 무덤과 다름 없는 상태로 무심히 20년을 지내 오면서 매년 순교자 첨례일에는 많은 교우들이 이 묘지에 참배하고 1년 1차례 관내 각 공소 교우들도 여기서 모여 순교사기를 낭독하며 순교 조상들의 정신과 공적을 묵상하여 오던 중 순교자들의 무덤이 너무 초라함을 느끼게 되어 작년 신균식 본당신부님의 지시에 따라 회장 회의에서 천묘 20주년을 기회로 무덤수축, 범신부 묘비를 건립할 것을 결의하고 15만환의 성금을 모으고 순교자 현양회의 원조를 청하여 한국 명물 남포 오석의 묘비와 15척 철근 콘크리트 위에 5척 백색 화강석 십자가로된 순교탑을 1955년 4월 2일에 건립하였다는 바 반공에 우뚝솟은 이 순교 탑은 천주는 누구시고 사람의 영혼은 무엇인지 무언 중 설교하고 있어 교우들의 신덕을 굳게하고 (경향잡지 1955년 7월 1일 발행 47권 1048호에서 발췌)
그 후 생매장 순교지는 외인의 경작지로 바뀌게 되고 해미 공소에서는 수 차례에 걸쳐 매입을 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974년 초에 해미 고상득(프란치스코)이 생매장 순교성지 터 409평 을 매입하여 서산 본당 이규남신부께 봉헌 하게 되어 이규남(요셉)신부 주선으로 1975년 10월 24일에 높이 16m 철근 콘크리트 해미 순교탑(회장 유현석 봉헌)을 황민성 베드로 주교 주례로 축성 되었고, 그 후 현양회장 이진교(베드로)의 활동으로 계속해서 성지매입 작업을 하게 되고 성가 소비녀 수녀원에서는 순교탑 주변의 땅 1,700여평의 땅을 확보 하면서 점차적으로 성지가 가꾸어지기 시작하였다.
해미성당 초대신부인 윤종관(가브리엘)신부가 1985년 4월 10에 부임 본격적인 성지개발이 시작되었고 제3대 주임신부 김종수(아우구스띠노) 신부는(2009년 3월 25일 보좌주교 성품) 1995년 8월 12일 경갑룡요셉 교구장의 지시에 의해 해미 무명 순교자 상홍리 묘소를 파묘 하여 해미 순교탑 앞으로 천묘 하라는 주교의 명을 받들어 동년 9월 18일에 상홍리 묘소를 파묘하고 순교자 유해를 별도로 모시고 진토가 된 순교자의 유해는 두개의 백자 항아리에 담아 순교탑 앞 작은 묘소를 만들고 그 안에 모셨다. (1995년 9월 20일 순교자 대축일 현양대회 개최)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순교자의 유해는 충남 대학교 김원석 교수팀에 의해 특수한 불포화 폴리에스테르 수지 안에 넣고 밀봉하여 1996년 7월 10일~9월 11일에 보존 처리하고, 순교자의 치아 242개가 수습되어 대전에 치과의사 김민형(요셉)의 봉사로 1996년 6월에 한분씩의 치아가 구분이 되는데 이때 밝혀진 순교자의 치아는 2개 이상 치아를 가지신 분만도 18분이 되었고, 치아가 잘 판명이 안 된 것은 33개나 되었다. 18인의 치아를 연령으로 구분해 볼 때 20대가 8인, 30대가 7인, 40대가 2인, 50대가 1인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분들의 유해는 보존 처리되어 해미 성당 기도방, 해미 성지의 천막 성당의 유해 참배실 옮겨 모시게 되고 2001년 2월 8일 교구 인사 발령에 의해 해미 성당과 해미 성지가 분리되고 안상길 사도요한신부가 성지 초대신부로 파견이 되면서 성전건립이 본격 추진되어 2001년 8월 6일에 천막 성당에서 총대리신부 주례로 성전 기공식을 하고 2003년 6월 17일에 경갑룡요셉 주교의 주례로 대성당에서 성전 축복식이 있었고, 성지주임 제2대 백성수(시몬) 신부의 지도하에 순교자기념관을 새롭게 단장하고 2009년 10월 17일 유흥식(라자로)주교의 축복으로 순교자들의 유해를 경건하게 모실 수 있게 되었다.
순교자 기념관 자리만 하더라도 1964년 봄에 해미공소 신자였던 유인협 요한씨의 증언에 의하면 순교자의 유해가 발견된 장소라고 한다. 당시 유인협 요한 씨는(당시 나이22세) 아버지(유순봉 베드로)와 성지 주변에 300평의 땅과 국유지 600평의 밭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는 밭에서 나오는 보리나 콩과 같은 작물 보다는 벼를 경작하여 얻는 쌀이 훨씬 소득이 있었기에 밭을 논으로 만드는 개답을 하기 위해 땅을 파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종아리뼈 2개가 꼿꼿하게 서 있었고 숯덩이와 함께 발견되었다 당시 구덩이의 흙은 가는 모래로 되어있었는데 모래가 약간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흙에서는 그 때까지도 사람의 시신이 부패하여 풍기는 냄새가 많이 나고 있었다. 아버지(유순봉 베드로)와 상의하여 현재 성지 교육관 부지(조산리 299-25) 주변에 돌무더기가 있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돌무더기를 헤치고 그 안에 구덩이를 만들고 묻어 주었다. 라고 유인협 요한은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곳 생매장 순교성지 어디에 순교자의 유해가 묻혀 계실지 모르는 순교지라 하겠다.
최근까지 밝혀진 순교자는 132명에 불과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자리개질로 순교한 순교자는 1명 수많은 이가 생매장 또는 수장으로 순교하였으나 생매장으로 기록된 순교자는 불과 3명밖에 없는 것으로 미루어 해미순교성지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자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당시 해미현에 거주하면서도 다른 지역에서 순교한 순교자도 찿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