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의 무덤
인언민 (마르티노)
시복일: 2014년 8월 16일
인언민(1737~1800)은 덕산 주래(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알렉시오)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으며, 이내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서울로 올라가 주문모(야고보)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공주로 이주해 살다가 정사박해 때 체포되어 공주와 청주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해미 진영으로 다시 압송되어 해미 옥에서 마르티노는 젊은 이보현(프란치스코)을 동료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였고,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 아래서도 전혀 변함이 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이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리들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인언민 마르티노에게 갖다 준 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 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결국 마르티노는 이러한 형벌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한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시복 선포되었다.
김진후 (비오)
시복일: 2014년 8월 16일
김진후(1739~1814)는 김대건(St.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충남 면천 솔뫼(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출생, 그의 집안은 맏아들 종현이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 모두가 이를 따르게 되었다.
김진후는 1791년 신해박해 이후 4~5차례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곤 하였으며, 1801년에 다시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얼마 후 해배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진후는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고, 이때부터는 굳게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박해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사형 판결을 받지 못한 채 10년 가까이 옥살이를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당시의 나이는 75세였다.
그는 옥중에서도 굳은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다른 수감자들을 감화시켰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시복 선포되었다.
이보현 (프란치스코)
시복일: 2014년 8월 16일
이보현(1773~1800)은 덕산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20세가 좀 넘어서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토마스)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이보현(프란치스코)의 누이였다.
입교 이후 이보현은 교리를 자유롭게 실천하기 위해 매제 황심과 함께 충청도 연산으로 이주해 살았고,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다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797년 정사박해 때 연산에서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해미 영장 앞으로 이송되어 심한 매질을 당하여 2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시복 선포되었다.